서울 강남구 영동대로86길 11 2층 남도음식점 고운님
'고운님'의 남도 밥상
멋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맛이란 무엇인가? 격(格)에 들어가서 다시 격을 나오는 것, 그 격을 나와서 새로운 격을 낳을 때만이 건넘은 멋, 건넘은 맛이 아니라 오랫동안의 삭힘을 거쳐'개미'가 나오는 것이다. '개미'란 남도음식의 특유한 맛을 말하며,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이것이 남도음식의 진수다. 이것이 소리로 갈 때는 쉬긴 소리가 아니라 '그늘이 있는 소리'인데, 남도에서 이 말을 쓸 때는 '그늘을 친다'고 한다. 그래서 맛도 그늘이 있는 맛, 즉'개미'가 있다는 말로 변형되며, 소리도 그늘이 있는 소리, 사람도 품새가 넉넉하면 '그늘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 송수권 '남도의 맛과 멋' 중에서
고운님'의 남도 밥상은 찰지다. 홍어삼합도 찰지고 민어지리도 찰지고 심지어 매생이 국물까지도 찰지기만 하다. 음식 솜씨로 따지면 그 많은 남도음식점 중 단연 으뜸이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그 그늘에 담긴 '개미'만큼은 영락없이 속 깊은 남도음식이다. '고운님'에서 우리가 먹는 건 그리운 고향의 맛이고 어머니의 손맛이고 굽이굽이 절절한 삶의 맛이다.
강남 대치동의 남도음식점 '고운님' 정춘근(50) 사장의 고향은 전남 완도군 고금도다. 고금도는 전형적인 반농반어의 섬이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을 나와 화순에서 광산업을 했고, 어머니는 부잣집 따님이었다. 그렇지만 삶의 풍파는 일찍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어머니는 '머리끝으로 이고 져가며' 삼형제를 키워냈다. 그 역시 '반머슴' 노릇을 하며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뒤 대처로 나가야 했다.
광주로 나온 그는 구두닦이도 하고 간판 일도 배웠다. 간판 일을 배울 때 스승의 가르침이 어찌나 혹독했던지 원망도 많았다. 스승은 참 별난 사람이었다. 일을 할 때는 절대 장갑도 끼지 못하게 했고, 좋은 옷을 입지도 못하게 했다. 장갑을 끼면 손끝이 무디다는 게고 좋은 옷을 입으면 몸을 사리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일뿐 아니었다. 누군가 길이라도 물을라치면 "따라오시오!" 하며 앞장서 목적지까지 데려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고, 어떤 일을 물어와 놓고도 그 답을 채근하지 않으면 오히려 "귀하는… 귀하께서… 아시고자 하건데…" 하며 서간으로라도 기어이 꼬치꼬치 답을 하고야마는 성미였다. 한때의 원망은 살아가면서 그에게 삶의 자세에 대한 교훈으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에 그는 일찍이 장사에 발을 들여놓았고, 음악감상실, 당구장, 호프집, 가라오케 등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했고 벌만큼 벌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배우지 못한 한'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침 대구에 살던 한 친구가 그에게 배움을 권유했고, 그는 한동안 그 친구 곁에 머물면서 '불철주야'에 '주경야독'을 거듭했다. 어렵게 중·고등과정 검정고시를 패스한 그는 스물여덟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광주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나중에 총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95년 광주에서 고깃집을 내면서 음식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광주 충장로에서 의류사업을 하던 형이 부도를 내는 바람에 보증에 당좌를 내주었던 그 역시 잔뜩 민폐만 끼친 채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재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봤지만, 끝내는 본의 아니게 부도를 낸 죄로 잠시 '콩이 들어간 밥'을 먹기도 했다. 그는 광주에서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동서울터미널에 국밥집을 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나마 그런 꼴의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그에게는 마지막 남은 삶의 희망 같은 것이었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몇 번씩 손톱이 빠지도록 국밥도 끓이고 직접 배달도 했다. 배달을 나갈 때면 으레 양복 차림을 하고 다녔다. 그것은 바닥까지 떨어져버린 자신감을 어떡하든 되찾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했다. 아무리 고층이어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엘리베이터에 냄새가 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참 어지간히 열심히도 뛰고 뛰었다. 고만고만한 가게에서는 생각하기도 어려울 만큼 돈도 벌었다. 하지만 한 번 진 부채의 굴레를 벗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로 논현동에 남도음식전문점 '고운님'을 낸 것은 2001년의 일이었다. '고운님'이라는 상호는 알고 지내던 황청원 시인이 지어주었다. 논현동의 '고운님'은 입소문을 타면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는 새벽 장 보는 것부터 가게 인테리어까지 모든 일에 정성을 쏟아부었다. 2006년에는 논현동의 가게를 고향 선배에게 넘기고 대치동 포스코 근처에 같은 이름의 가게를 새로 냈다. 가게가 골목 안에 자리한 탓에 장사가 쉽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깨고 3개월 만에 수익분기점을 넘겼다.
그는 음식 장사는 '무엇을 파느냐'보다 '어떻게 파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음식 재료를 선택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사람을 쓰는 일에도 온갖 신경을 다 쓴다. 무채 하나를 써는 일도 채칼 같은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일 때문에 지방에 갈 때면 꼭 열차를 이용한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그동안 읽기 어려웠던 책들을 읽으며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음식점 경영에 관한 책을 낼 작정이다. 어떻게 장사를 잘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그런 실제적인 이야기들을 써볼 생각이다.
그는 작년에 일 하나를 더 벌렸다. 미사리 조정경기장 근처에 남도음식점 '하얀 물결'을 새로 낸 것이다. '고운님'이 계절별 특선요리 중심이라면 '하얀 물결'은 남도음식을 코스별로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강가에 자리 잡은 입지를 살려 음식뿐 아니라 누구나 식사를 겸해 휴식을 취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꾸몄다. 일흔셋의 나이에 아들이 만들어내는 음식을 맛보며 '그만하면 괜찮다'고 다독거려주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음식을, 그런 집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그의 별명은 '배보'다. 음식점 주인답게(?) 그의 배는 항상 '남산'만큼 불러 있다. 어릴 적부터 밥풀 하나 남김없이 먹기를 배웠기에,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기에 그는 음식 남기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늘 남도식 식단의 반찬 허비를 최소화할 수 방법을 궁리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남는 음식 중 정말 아까운 음식은 그가 '최종처리'를 맡다 보니 뱃살을 줄일 겨를이 없다.
그에게 아버지와도 같았던 형이 199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인은 그토록 고생하면서도 동생들만은 어떻게든 건사하려고 했던 형이었다. 사업의 실패로 자신에게도 커다란 타격을 안겨주기도 했던 형이었건만, 그 형이 재기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병만 얻은 채 돌아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을 때 그의 가슴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애틋함으로 무너져내렸다. 아버지와 형, 그에게 간판 일을 가르쳐주었던 스승, 어려울 때 도움을 마다않던 고향 친구들, 살아계시지만 여전히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어머니의 얼굴, 그 손맛, 그 그리운 사람들과 그 그리운 맛이 바로 '고운님'과 '하얀 물결'이 내놓는 남도의 밥상이다.
남도음식의 깊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늘에서 온다. 곡진한 삶의 내력이 스미어들고, 오랫동안 곰삭아서 기어이 발효되고야 마는 그 깊은 '개미'에서 온다. 그 음식은 사람의 내장과 핏줄을 돌고 돌아 마침내 심성을 이룬다. 우리가 먹는 음식의 의미가 이러할진대, 우리의 식탁 위에 음식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올라오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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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님 강남역점 남도음식의 참맛 맛집 | 맛집멋집명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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